원자력 영화/TV 이야기 – 뉴스레터 7호

원자력생태계의 그늘, 『월성(2019)』

위덕대 한국어학부 김명석 교수
해오름동맹 원자력혁신센터

다큐멘터리가 시작되고 서울 한강변과 월성원자력발전소의 정경이 교차 편집되면서 지역민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월성 원전은 우리나라 핵폐기물의 절반을 배출한다. 그 곁에서 30여년을 살아온 황분희 할머니등 주민과 가족들이 갑상선암에 걸리고 몸에서 삼중수소가 검출되었다. 이들은 월성1호기 폐쇄를 요구하고 고리 원전의 균도네 가족 소송에 연대해서 참가한다. 균도네 가족은 1심에서 승소했으나 2심에서 패소한다. 황분희 할머니와 전국의 원전 지역 갑상선암 환자 618명은 공동 소송을 제기해서 1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월성』의 주요 내용이다. 기본적으로 인간 대 자연, 친원전 대 탈원전, 가해자 대 피해자의 이분법적 구도이다. 전자는 물질문명, 환경파괴, 착취 등의 부정적 요소이고 후자는 자연, 원시, 순수함, 친환경, 공유 등의 긍정적 요소이다. 한수원 대 지역민이라는 양 집단 간의 이항대립에서 친원전론자의 입장은 인터뷰를 통해 단순한 사실로 전달한다. 이에 반해 지역민의 입장은 내레이션과 자막을 통해서 구체적인 피해 사실로 전달함으로써 탈핵의 당위성과 피해 보상 요구를 더욱 부각시킨다. 관객들이 현재 갈등의 원인이 무엇이며 양측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공정하게 판단하려면 친원전측 입장과 탈원전측 입장을 대등하게 보여주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반대 주장을 나란히 제기하여 논쟁을 보여주는 논쟁적 틀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한쪽의 주장을 선별해 보여주는 수사적 틀 안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피해 호소자들의 삶과 행동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원전에 대해 폭넓게 인식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을 지나치게 이분법적 구도로 몰고 가는 파국적 전개는 황분희 할머니등을 탈원전의 선동가로 비치게 한다. 이 영화에서 문제의 원인을 추적하고 파악하는 관찰자적 태도가 아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월성』은 탈원전이라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제시한 증거가 객관적 사실임을 강조한다. 현장촬영 영상에 피해를 호소하는 주민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려주며 내러티브를 이끌어 간다. 또 전문가의 인터뷰와 함께 직접적 인용으로 기능하는 자료화면과 설명적인 그래픽을 사용한다. 또 자막을 통해 보여지는 해설로 진실성을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논쟁이 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양쪽 입장을 공정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탈핵을 주장하는 전문가의 인터뷰 내용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친원전 전문가를 내세우는 이 영화의 해석 방향은 이미 규정되어 있다. 이 때 관객의 자유로운 해석은 가로막히고 감독이나 작가에 의한 의미 전달의 방식은 선전영화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등장인물들이 사전에 합을 맞춘 대본을 보고 어떻게 계산된 연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다큐멘터리로서 현실정합성이 두드러지는 만큼 진정성이 담보되는지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하자.

영화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맨 처음 ‘한강 성산대교 309’부터 공간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지역명+숫자’의 자막이다. 관객은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한참 지나서 ‘황분희 집 월성원전 1km’라는 자막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월성원전과 떨어진 거리를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큐멘터리로서 자막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이 영화는 마지막을 클로징 자막으로 끝맺는다. 균도네 소송이 패소하고 월성 주민들은 절망한다. 해설자의 목소리는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자막으로 대신한다.

“월성 주변 갑상선암 환자 618명은 현재 공동소송의 1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월성원전 내 핵폐기물 임시저장시설의 추가건설 여부를 조만간 결정한다.”

소송의 결과가 어찌 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열린 결말은 사실주의적 영화에서 전형적인 것이다. 이런 타이틀은 여전히 이들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문제 제기와 이에 대한 관심을 함축적으로 촉구한다. 이러한 엔딩은 사실에 대한 호소이며 감성적인 호소이기도 하다.

영화 제목에서 보이듯이 이 영화는 근대적 도시계획의 대표적인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다. 월성은 원전 지역이면서 송전탑을 통해 원전과 도시를 연결하는 공간이다. 도시와 원전 사이를 링크하는 공간 월성은 할머니들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곳이다. 이곳은 생태공간이면서 생태주권이 위협받는 공간으로 재현된다. 현재 발전소가 건설된 지역은 대부분 근대 산업화 시기 주변부의 소외된 지역이다. 경제적 이윤추구와 자본축적 면에서 생산성이 낮은 이 지역들은 인구밀도 역시 낮을 수 밖에 없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주변부는 대도시의 식량, 에너지 공급 장소로 변환되고 발전소 같은 위험 시설이 들어섰다. 개발이 덜 이루어진 주변지역에 위험 시설을 배치하고 위험을 떠안는 대가로 경제적 보상을 하는 정책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정책이 위험성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다카하시 데쯔야의 비판이다. 그는 이런 표면적인 보상과 희생의 구조를 ‘희생의 시스템’이라고 한다. 당장은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할지 몰라도 희생의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중심-주변의 공간구조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지역 불균등성을 고착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농촌의 스펙터클로 비추어지는 공동체적인 농촌질서는 파괴된지 오래다. 이곳을 살아가는 소수자로서 주민들은 살아 있는 화석과 같다. 이곳의 고립된 개인들은 모여 시위대라는 가장된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실시된 것과 함께 월성 주민들은 원전 폐지, 맥스터 건설 반대를 외친다. 대신 안전하고 친환경적인 에너지로의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으로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는 현실에서 원전 가동 없이는 에너지전환도 불가능하다. 방폐장을 철회할 수도 없다. 이를 알면서도 피해 호소자들이 끝없는 농성을 이어가는 것은 보상을 더 해달라는 것 뿐이다. 영화는 환경운동으로 비추고 있지만 월성에서의 싸움은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것이다. 게다가 월성원전 1호기의 해체가 시작되면 지역에서 또 다른 방사능 누출, 오염 시비가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이다. 향후 50여년은 원전 지역의 환경정화에 의한 부지 복원에 전력을 다해야 할텐데 영화는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이 영화는 할머니들이 생태적 주체로, 삶정치(bio-politics)적 주체로 저항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한국사회에서 지배담론에 대항하는 노동자나 남성 등은 대개 목소리 크고 행동하는 힘있는 주체들이다. 오랫동안 평범한 삶을 살아온 노인으로서 ‘할머니’는 지식인도, 남성도, 젊은이도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수많은 질곡을 몸으로 감당하며 묵묵히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그리고 경제성장기에는 국가계획에 순응하고 봉사해왔다. 언제나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타자로 존재하며 오랫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정치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월성』의 황분희 할머니등은 대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목소리를 발화선 위로 끌어올린다. 발화자인 할머니의 구술로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이들은 실천하는 생태적 주체로 등장한다. 할머니들이 고립된 개인에서 집합적인 주체로 거듭난 것이다.

이처럼 월성 원전 지역 주민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것은 삶정치의 가능성이다. 주민들이 행동에 나선 주요 계기는 식수와 몸에서 삼중수소가 검출되면서이다. 월성이라는 일상 공간이 삶정치적 공간으로 변화되고 모든 주민이 시위대가 된 삶은 정치적 공론장으로 변환되었다. 그러나 삼중수소가 암 발병을 유발하기에는 검출량이 미미하고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는 연구 결과(한국원자력학회-대한방사선방어학회 보고서, 〈삼중수소의 인체 영향에 관한 과학적 분석〉(2016))를 반박할 수 있는 주민은 없다. 일례로 황분희 할머니는 가끔씩 발전소 돔 위에서 핵폭탄 터질 때처럼 버섯구름 나오는 걸 목격했다고 한다. 펑 소리나면 보기 좋아서 구경하곤 했는데 깨끗하고 좋은 에너지라 해서 의심하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민들이 원자력 발전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피해의식에 젖어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버섯구름이 나올 정도의 고열이 돔에서 뿜어져 나온다면 발전소가 멀쩡할 수가 없다. 원전에서는 스팀 덤프(steam dump)를 수시로 하는데 그때 나온 수증기를 보고 오해한 걸로 보인다. 또한 지진 발생과 원전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들은 과도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한수원이나 원자력계의 노력이 미비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한수원은 지역 주민들의 이주를 비롯한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굴업도, 안면도 및 위도에서의 핵폐기물 저장소의 실패 이유를 면밀히 검토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해당 지역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협의로는 지역 주민이, 광의로는 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어야 할 것이다.

전국의 원전 주변지역 갑상선암 환자들이 벌인 소송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정부의 대책과 함께 이들이 오해를 풀고 과도한 불안을 내려놓는다면 객관적인 자료를 제대로 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래야 이들의 저항의식은 신자유주의 속에서 불평등하게 분배된 생태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재평가될 것이다. 또한 경제적 보상이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주변부의 희생이 고착화된 한국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도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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